Forget Your Flesh


전시 설명

XX와 같이-함께의 정점-영점에서
: 어떤=하나의 이름으로 누가 불러 세운다고 해도…

정체성 이야기를 잠시 해볼까 했지만, 증명-간증의 표피를 두르게 되자 곧 무장해제 불능의 상태가 된다. 표피와 속이 동질화되면서 공격과 방어의 최전선에 서게 된 정체성—그것은 가려져 있는 한 이해를 못 받는 동시에 표출하자마자 외부적인 각인—스스로 그러거나 다른 사람, 집단, 사회, 더 넓게는 이 세계 속 기호나 상징—때문에 주어진 것이 되고 만다. 그렇다면 본래적 정체성이란 대체 ‘무엇’이고/이라 말할 수 있고, 정체성이 본래적이라면 생물학적 특징과 ‘어떻게’ 다른지, 이때 ‘어떻게’는 말로 하거나 옮겨 적을 수 있을지… 말은 듣는 사람을 전제한다.

말을 귀담아듣는 사람이 전제될 때, 운동은 정식화되고 내부의 운동성은 멈춰버린다. 우리가 정체성을 (각자) 맺는 관계, 그것은 외부적 운동에 머무르지-봉착하지 않는다. 어떤 선언이나 주장의 관계 맺기와 다른 동력이 정체성에 이미 내재되어 있다—내부적 운동, 바로 외부에서 주어지는 것 대신 내적으로 맺는 관계의 동력이다. 이희단의 전시 «Forget Your Flesh»는 이 동력을 이미지에, 더 정확히 말하자면 형상화하기에 찾는다. 그런데 왜 하필 이미지일까? <히키코모리 낭만>에 편린으로서 등장하는 ‘나’와 픽셀세계의 여성들, 이미지로서 죽음과 부활을 반복하는 <핑키윙키 아카이브>의 핑키와 윙키, <Okay Bishes, We re In>에서 변주되는 사운드, 이들은 편집되고 어떤 경우에 ‘n차 창작’의 운명을 겪는다. 이런 운명은 정체성과 어떤 관계일까? 이들에게 정체성은 없거나 매몰된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이런 질문이 당연히 떠오르지 않을 수 없다.

질문은 오히려 질문을 재생산한다. “정체성이란 본질적인가?” 이 질문에 내부적 운동을 도모하는 태도로 답을 하고 싶다. 글이나 말로 외부에 표출하거나 외부에서 각인 받는 것에 뿌리를 두는 것 대신 정체성은 내부적으로 맺는, 그러나 외부-내부가 단일하게 동질화되기 어려운 것들이다. 이미지 덕분에 평생 숨 쉬고 죽음을 선고 받는 대신, 정체성은 자신에게 여러 개 이름으로 이미지를 재생산하여 제공한다. 이때 재생산은 동어반복에 근거하는 것—반복되기 전의 것에 의거하는 것—과 달리, 자신과 동일한 것으로 간주하는=동일시하는 태도이다1. 외부에서 ○○성, ○○다움/스러움, ○○에 근거한 것들처럼 이미지가 ‘지배하는’ 세계 대신 각자의 세계에 내적으로 향하는 동일시가 정체성을 형상화한다—내부에서 내가 ‘덮어(/) 쓰고’ 살아가는 정체성. 우리의 허구는 각자 자신을 호명하는—XX의 이름으로 불리는—것들이 되려고 한다.

호명의 기점-영점(零點)에서 포스트-아포칼립스를 생각하기—상상하기. 사실 우리가 생각해온 아포칼립스는 정식화된 지 오래다—상상의 결여라는 상상의 봉착점. 전시된 작품, 특히 <히키코모리 낭만>에서 포스트-아포칼립스는 ‘파탄된 세계’, 더 정확히 말하자면 ‘파탄된 세계라는 시나리오’라는 이름의 ‘안착지’ 이후의 상태를 고민하는 공간이다. 시나리오로 끊임없이 소환되는 문명의 혼돈과 사회의 상실을 대신하는 아포칼립스를 ‘다시 생각하기’. 말하자면-이름하자면, 그곳은 흔들리는 지대이다. 이희단의 전시는 (문명과 사회가 그렇듯이) 상징과 기호에 견고한 의미와 굳건한 의지를 찾는 대신, 이미지를 재생산-생산하여 자신에게 부여하는 공간이다. 서사는 무엇을 위한-무엇에 봉사하는 구조 대신 내부적으로 관계 맺는 정체성 형성의 공간이 된다—그곳을 다시 생각하기-상상하기.

우리—핑키와 윙키를 포함한—는 누가 씌워준 것이나 스스로 안착—안일하게(도) 착륙—하기를 바라는 대신 허구가 되려고 한다. XX 같이-함께의 세계, XX와 같은 나와 함께 하는 허구의 세계는 진실된=‘진짜의’나 ‘실제의’라는 수식어로 표백된 세계에 맞선다. 과거에 대한-봉사하는 오마쥬 대신 이름을 자신에게 주는 행위는 인간뿐만 아니라 예술형식 마찬가지로 정체성이 관계 맺는 지대를 그리도록 한다. 게임 같은, 뮤직비디오 같은, 퍼포먼스 같은, 삽화 같은 이미지들… 그런 의미에서 혼합매체의 단일한 작품—오브제, 조각‘적인’, 설치작업—처럼 한눈에 혼종적인 것 대신 작가는 돌연적이거나 비교적 자연스러운 변이의 결과를 동반한 (이미지의) 형상화를 통해서 정체성에 관한 질문을 이끌어나간다. (작품이건 ‘나’건) 자신이라는 믹스트 미디어(mixed media)의 궤도, 그 알 수 없는 길 속에서 내가 스스로 부르는 일이 된다—어떤=하나의 이름 대신, 동일시를 통해 재생산되는 어떠어떠한 이름(들)로.

1 ジャン=リュック・ナンシー「アイデンティティ:断片、率直さ」伊藤潤 一郎訳, 水声社, 2020, p. 62-63(Jean-Luc Nancy, Identité. Fragments, franchises, Editions Galilée, 2010)

글: 콘노 유키


작품목록

Okay Bishes, We’re In, 2021
a. <OBWI에 대한 소개>, 2021, 싱글채널 영상, 1분 19초
b. <OBWI 가사지>, 2021, 투명 접착 포스터, 29.7x42 cm
c. <우리의 감수분열은 증식형 가닥들로 진행되지>, 2021, 렌티큘러 인쇄, 각 19x41cm
d. <OBWI 가계도>, 2021, 알루미늄 UV 인쇄, 62.7x27.4 cm
e. <최후의 OBWI>, 2021, Jampad의 워크시트와 사운드, 시트지 인쇄, 5분 56초
f. <Forget Your Flesh>, 2021, 포그머신 설치, 매일 오후 4시|7시 반

<히키코모리 낭만>, 2020-2021, 싱글채널 영상, 22분 19초

<핑키윙키 프로젝트 아카이브>, 2021, 12 페이지 매거진, 29.7 x 21 cm

<쳇(웜뱃 1)>, 2020, 캔버스에 유채, 53 x 33.4 cm

<쳇(웜뱃 2)>, 2020, 캔버스에 유채, 53 x 33.4 cm


전시 기간

7월 14일 - 26일


기획

이희단


참여 작가

이희단


사운드

Jampad


디자인

백유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