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ch a Drag!
전시설명
분신1의 첫 번째 개인전의 제목인 ‘Such a Drag!’은 ‘지겨워 죽겠어!’라는 의미의 관용구이다. 작가는 남성이 화장하는 행위가 이분법적인 젠더 규범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언어적인 폭력을 경험한 적이 있다고 말한다. 한국의 퀴어들은 이처럼 일상 속에서 빈번히 혐오 표현과 편협한 시각을 마주한다. 한편, 제목 속의 드래그Drag는 드랙 문화를 지칭하는 용어로도 사용된다. 특정 인물이 드랙을 하고 무대에 서는 일반적인 드랙 퍼포먼스와 달리 전시는 ‘공간’이 드랙을 하도록 연출한다. 전시장 곳곳에 위치한 과장된 화장과 가발, 무대 장치 그리고 음악과 같은 요소들은 전시장을 찾는 누구나 자신의 상상 속에서 능동적인 드랙 퍼포머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을 촉발한다.
이 글은 몇 달 전 지인의 소개로 한 작가를 만나 원고를 청탁받으면서 작성하게 되었다. 그는 가삼로지을에서 진행하는 ‘릴레이 익명 가명 전시’의 참여 작가 중 하나로 개인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익명의 작가명은 ‘분신1’로, 전시에서 드랙 문화를 차용해 퀴어 정체성에 관한 작업을 선보일 예정이라고 했다. 나는 분신1의 본체에게 관객을 대상으로 자신에 대해 어디까지 공개할 수 있는지 물어보았다. 그는 자신이 공개적으로 커밍아웃하지 않은 30대 게이이며, 회화 작업을 하는 작가임을 밝힐 수 있다고 대답했다. 분신1의 작업과 본체의 작업이 어떻게 다른지 물어보자 그는 자신이 회화 작가라면, 분신1은 이번 전시에서 비회화-설치 작업을 전개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이어 스스로 ‘은둔’이라 지칭하는 그는 정체를 감추고 선보이는 분신1의 전시에서 좀 더 뻔뻔하게 정체성에 관한 작업을 선보일 것이라고 얘기했다. 익명의 작가에 의한 퀴어 전시. 기대가 되는 동시에 나는 과연 그의 익명성이 얼마나 견고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들었다.
작가는 이곳에서 분신1로 분해 일련의 비회화-설치 작업을 보여준다. 그에게 있어 회화와 비회화 작업 사이에는 매체라는 차이뿐만 아니라 작업을 대하는 태도에서 가장 큰 차이가 있다. 회화가 자신의 내면으로 침잠하는 작업이라면, 비회화 작업은 좀 더 세상과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본체와 분신, 회화와 비회화를 구분하는 모습은 오히려 실제 작가(본체)의 존재감을 더욱 공고하게 만든다. 이곳에 전시된 작품들과 전시를 홍보하기 위한 인스타그램 계정에는 본체의 흔적들이 조각난 채로 남아있다. 전시장을 찾은 관객들, 특히 작가의 기존 작업을 지켜봐 온 사람이라면 이러한 흔적들을 조각조각 모아 그의 정체를 특정하는 것이 어렵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마도, 우리는 끝까지 쫓아가 그가 누군지 밝혀내려 하지 않을 것이다. 우악스럽게 분신의 가면을 거꾸로 뒤집어 그가 누군지 밝혀내려 한다면 더 이상의 분신술은 보지 못 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작가는 왜 이렇게 느슨한 가면을 쓰고서라도 자신과 거리를 둔 채 이야기해야 했을까.
익명의 이름으로 전시를 선보이는 분신1과 마찬가지로 퀴어들에게 가면을 쓰는 행위는 이미 익숙한 일이다. 가령 현재는 정체성을 완전히 오픈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학창 시절 사회적 낙인이 두려워 자신을 시스젠더 이성애자인 것처럼 행동했다든지, 또는 아직도 일상에서 마주하는 ‘여자/남자친구가 있는지?’나 ‘결혼 계획이 있는지?’와 같은 질문에 대답을 얼버무리는 것처럼 말이다. 사회적 낙인에 대처하기 위해 가면을 쓰는 것과 사회가 규정하는 성 역할에 반하여 드랙을 하는 것은 자신의 정체성에 위에 여러 층의 레이어를 얹는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지만, 그 방향은 양극단을 가리키고 있다.
텍스트가 나열된 일련의 (비)회화 연작은 물감이 아니라 파운데이션(화장품)으로 제작되었다. 마치 성경의 구절을 필사한 것처럼 보이는 이 작품 속 문구는 사실 뮤지컬 헤드윅의 수록곡인 ‘사랑의 기원(The Origin of Love)‘의 가사이다. 주지하다시피 ‘사랑의 기원’은 플라톤의 저서 『향연』에 등장하는 아리스토파네스의 연설 속 내용을 각색한 곡이다.
아주 오랜 옛날 구름은 불을 뿜고 / 하늘 넘어 높이 솟은 산 오랜 옛날 / 두 쌍의 팔과 두 쌍의 다리를 가진 사람 / 하나로 된 머리 안에 두 개의 얼굴 가진 사람 / 한번에 세상보고 한번에 읽고 말하고 / 한없이 큰 이 세상 굴러 다니며 / 아무 것도 몰랐던 시절 사랑 그 이전….
그의 연설에 따르면 아주 오랜 옛날 둘이 하나로서 완벽했던 인간은 신들의 노여움을 사 둘로 쪼개어졌고, 아직까지도 본래의 하나인 몸으로 돌아가기 위해 서로의 반쪽을 찾고 사랑을 나눈다. 여성과 여성, 여성과 남성 그리고 남성과 남성이 하나의 몸이었다고 언급하는 그의 연설은 성별 이분법적이고 이성애 중심적인 상상력의 한계를 뛰어넘어 다양한 형태의 관계에 대한 가능성을 시사한다.
분신1은 이번 전시에서 작가 스스로 분신술이라고 명명한 행위를 통해 자신의 존재를 감추는 대신, 어느 때보다 분명한 목소리를 전달한다. 그는 이곳에서 생물학적인 성과 사회적 성 역할에서 일시적으로나마 벗어나 드랙의 문법으로 자신이 세상과 관계 맺으며 지금껏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자유롭게 펼쳐 보인다. 그는 ‘제3의 성은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지는 것은 아닐까’라는 상상력을 통해 무수히 많은 형태의 사람과 사랑이 존재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그의 분신술은 여기서 끝이 아니다. 분신1에 이어 또 다른 분신들은 앞으로 어떤 이야기를 보여줄 수 있을까.
끝으로 글을 쓰며 문득 떠오른 2년 전 겨울의 이야기를 해볼까 한다. 한 전시의 뒤풀이에서 처음 만난 중견 작가는 얼큰하게 취한 채 술잔을 들고 불쑥 내 옆자리에 앉았다. 곧이어 그는 마치 모두가 들으라는 듯이 커다란 목소리로 나에게 말했다. “혹시 게이 같다는 소리 많이 안 들어봤어요?” 이런 식의 무례한 경우는 사실 수도 없이 겪어왔지만 그날따라 참을 수 없이 지겨워 죽을것 같았던 나는 “네. 그런 소리 많이 들어봤는데, 저 게이 맞아요.”라고 대답했고, 그는 예상치 못한 반응에 그만 얼어버리고 말았다. 소란스럽던 주변에는 잠시 동안 침묵이 흘렀다.
글: 이규식
작품목록
Such a Drag! + Shell, 2021, 혼합매체, 각 53.0 x 45.5 cm
Foundation, 2021, DLF 17W, 17N, 17C, Glitter on canvas, 20.0 x 20.0 cm(each)
Such a Drag!, 2021, 혼합매체, 가변설치
Such a Drag! + Dummy, 2021, 혼합매체, 97.3 x 52.9 cm
Foundation, 2021, DLF 13C, 21N, 23C, 25N, 27W on canvas, 53.0 x 40.9 cm(each)
Such a Drag! + Shell, 2021, 혼합매체, 53.0 x 45.5 cm
전시기간
11월 1일 -14일
기획
분신1
참여작가
분신1
디자인
고경호
촬영
양승욱
공간
정진욱